■ Issue Point
▶ 감독 몬테 헬만 미국 B무비의 전설적인 이름. 로저 코먼의 제자이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동료, 그리고 박찬욱에게 영감을 준 미지의 거장. 저예산 독립 제작방식으로 호러 영화에서 서부극, 액션 어드벤처와 로드 무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헬만의 작품들은 거친 듯 하나 세밀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특히 무명 시절의 잭 니콜슨을 포함, 6,70년대 미국 독립영화를 이끌었던 주요 멤버들과의 작업은 헬만의 작품을 미국영화사의 안과 밖 모두에서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B급 SF물 로 데뷔한 이후 헬만은 서부영화와 범죄드라마 같은 장르영화에 주력했다. 그의 영화는 처럼 혁명적이지 않았고, 처럼 지적이지 않았으며, 처럼 미국사회와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장르영화이면서도 고전적인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따르지 않은데다, 드라마의 고저 없이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영화는 무채색에 가까워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헬만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대표작들이 미국인의 흔들리 는 정체성과 암울한 사회상을 실재했던 모습 그대로 반영한 미국영화라는 것이다. 몬테 헬만은 5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 동안 알게 모르게 50편이 넘는 작품에 관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크레딧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린 경우는 많지 않다. 의 제작자 같은 몇몇 그럴듯한 타이틀을 제외하면, 대부분"주어지는 대로"임했던 탓이다. 그는 대타 감독으로 일하기를 꺼린다거나 작은 일이라고 거절 하는 법이 없었으며, 자신의 전력을 숨길 마음 또한 없다. 헬만은"나는 내게 흥미로운 작업을 추구했을 따름이며, 동시에 내게 주어지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에도 흥미로운 건 많은 반면 주어지는 일거리가 적다. 그래도 나는 같은 길을 계속 간다. 그것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헬만의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영화제작자의 생존 방식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다. 헬만은 을 만들던 때부터,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았고, 가르침을 얻기도 원하지 않은 채, 스스로 영화 만들기를 터득해온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아버지가 사라진 땅에서 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 줄거리
은 왠지 오직 하나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영화인 것만 같다. 감독의 전작 에서도 출연한 프랭크(워렌 오츠 역)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본편은 오프닝의 긴 문장 대사로부터 곧바로 영화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시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행기 조종과 수상 스키에도 흥미를 잃었다는 인물이 닭싸움에 대해서는 지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는 선언에서 독자는 즉각적으로 비행기와 스키에서 기계 위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반대편 닭싸움에서는 닭을 상상하게 된다.비행기 조종과 수상 스키는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직접 현장에 들어가는 직종이라면 닭싸움은 닭을 조련하고 투계장에서 코치를 보는 것 외에는 일단 투계 자체에서는 이선으로 제외된다는 점이다. 즉, 여기에는 나의 안전이 담보되면서 오히려 타자의 죽음이 예정되어있다는 생사지로가 놓여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비행기 조종이나 수상 스키는 사고의 경우 자신이 죽음에 처하게 되지만, 닭싸움에서 닭의 주인은 도무지 그같은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화의 오프닝은 비행기 조종이나 수상 스키의 무료함을 말하고 오히려 닭싸움 자체에서는 생사혈투의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그것이 도박과 연관되는 것에 황홀경을 부여한다.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일종의 가혹한 조물주 이데올로기인데, '나의 안전'과 '너의 죽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가 된다.이같은 낯익은 설정에서 70년대 초반의 미국 자본주의의 뒤안길을 접합시키는 것은 무난하지만 탁월한 시선은 아니다.반대 측면으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1971년작 에서 혁명에 대해 조소했던 후안의 대사를 떠올려도 좋겠다.언제나 그렇듯 몬테 헬만의 세계는 묵직한 반전의 한 방이 엔딩에서 독자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본편 역시 동일하다.게다가 혼선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실질적인 주제적 암시로서의 영화 어구로 후반부에 실마리 하나를 던져준다. 투계장에서 팬들 가족과 촬영한 사진에서 주인공 프랭크이 목은 잘려나간 채 프레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로부터 조급한 독자는 혹시 엔딩에서 투계장에서 사고로 인해 닭의 갈고리에 그가 희생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섣부른 조바심을 품게되지만, 몬테 헬만은 머리를 단순히 셍물학적인 머리로 간주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선물을 보낸다. 확실히 박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의 저력이 느껴지는 엔딩에서 프랭크는 자신에게 투계 최고의 영예 메달을 받게해 준 하얀 닭의 목을 단번에 쑤욱 뽑아서 그것을 그대로 애인 엘리자베스의 손에 피투성이 그대로 안겨준다. 위에서 말하는 박력이란 이같은 동물 학대의 엽기성이 아니라 행위 이후에 전개되는 애인과 프랭크의 면모의 대비다. 애인 엘리자베스는 프랭크의 투계꾼 직업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보이며 이별을 선언하면서 손수건으로 뽑혀진 닭의 목을 감싸안은 채 떠나는데, 이를 본 프랭크는 극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처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최고의 박력이란 바로 이 대사에 있다. '그녀는 날 사랑해...'. 박력이란 본시 철저한 자신감에 기초하기 마련이라면 엔딩에서 프랭크의 확언은 엘리자베스가 유지하려는 중산층적 윤리에 가득찬 삶에 대한 위선을 읽어낸 주인공이 타자의 죽음 위에서 자신의 실존으로서의 긍정 혹은 그 너머의 쾌감을 지속해온 존재론을 그녀의 위선과 동일시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비견하자면, 어차피 타인의 희생 위에서 지속되는 착취 형태를 윤리라는 이름의 포장으로 덮으면서 외면하거나 무지한 미국 중산층의 유지 동력에 대해서 거의 일방적이고 비논쟁적인 혐오를 쏟아부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확실히 감독의 전작들 , , 의 미학적 모호함에서 현실적 노골성이한층 더 강화된 것으로 60년대 중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대중들의 은폐된 실존적 불안이나 무력함이 전작에서 도플 갱어나 필름 화재 등을 통해 일종의 부재 의식으로 드러낸 것에 비해 본편에서는 죽음 자체를 선명히 전달하는 과격함을 보인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전작의 인물들이 극히 말수가 적었던 것을 본편에서는 주인공이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점도 또다른 전진의 양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프랭크가 말하기를 중단한 것이 스스로의 장담이 달성되지 않은 시점, 즉 투계 도박 승부에서 버크(해리 딘 스텐턴 역)에게 패자가 된 이후부터라는 것과 그가 다시 말하게 된 것이 투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라는 점을 연결시킨다면 본편에서 음성 언어로서의 '말'(그는 가끔 메모, 몸짓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한다.)은 그 기간 동안 실종되어야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기간, 즉 투견 대회 우승이 과연 어디를 지시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굳이 당대의 정치 사회적인 사건을 여기에 맞물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독자들은 아마도 1974년을 검색하게 될 듯 하다. 몬테 헬만의 60년대 중 후반은 7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어이지고 있으며, 그 중핵에는 죽음의 느린 화면/투계로 증명되듯이 죽이고 죽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승리 이후에 음성 언어를 발화할 수 있는 미국 백인이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에피소드식으로 나열되는 사기성 투계꾼들과의 승부와 폭력, 호텔 투계장에서의 강도단 침입 등은 장면 그대로 변두리 미국 사회의 날 것을 통해 당대의 지배적인 공기를 은유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주인공 프랭크가 다시 말을 하면서 애인의 사랑과 우승의 전리품을 획득하자는 말을 이어가는 것으로부터(사진 속)머리가 잘려나간 프랭크의 모습과 결부하여 일종의 무뇌 지대로서의 미국에 대한 공포를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음성 언어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죽음의 착취는 계속되겠지만, 적어도 위선의 거죽은 벗겨질 수 있을 것이다.은 죽음에 대한 직시를 통해서만 삶의 지속이 가능하다는 미약한 실존에 대한 각성극이며 70년대 중반 미국 사회가 음성 언어를 잃어버려야하는 이유에 대해 불투명한 기제를 던지는 반역적인 장애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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