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리고 인간이었다

Synopsis

■ Issue Point

▶ 잔다르크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리고 인간이었다
 화형대앞에서 두려움이 밀려와 굴욕적인 글에 서명을 하고 자신의 증언을 부정한다

■ 줄거리

로베르 브레송이 연출한 '잔다르크의 재판'은칼 드레이어의 작품과는 180도 다른 연출 방식을 보여줍니다. 극단적인클로즈업을 즐겨 사용한 드레이어와는 달리 브레송은 마치 TV드라마를보는것처럼 단순한 전신 혹은 반신 샷으로만 일관하죠. 배우들의 연기도극한의 감정을 표출하는 '잔다르크의 수난'과는 달리 거의 감정 표현을하지 않습니다.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표정밖에 모르는 것이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지요. 하지만 희한한 것은 그러한연기가 오히려 극에 몰두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브레송은 배우들이연기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무지막지할정도로 재촬영을 반복해서 연기할 힘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몰아붙였다고하죠. 그 결과 배우들의 안면근육은 거의 움직임을 잃었지만 희한하게도영화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감정이 살아있는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로베르 브레송은 시나리오의 거의 90% 이상을 잔다르크의 재판 기록에서가져왔습니다. 영화 속에서 심문관과 잔다르크가 나누는 문답은 모두공식문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다르크의재판만을 보여주지만 잠시 그 전까지의 역사적 상황을 부연 설명하자면헨리5세의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 이후 이뤄진 영국과 프랑스의 조약에서헨리5세와 프랑스 공주와의 사이에 태어나는 후계자가 영국과 프랑스양국의 통치자가 된다고 명시되었는데 헨리5세의 요절에 의해 후계자의나이가 너무 어리자 프랑스에서 통치를 거부하고 또 이를 부르고뉴 공국에서이의를 제기하면서 영국-부르고뉴 연합과 프랑스와의 내전 성격의 전쟁이발발합니다. 이 때 형편없이 밀리던 샤를 황태자를 구원한 것이 바로시골에서 상경한 16살의 어린 소녀 잔다르크였죠.
재판 당시 19살에 불과했던 잔다르크는 끊임없이 감시당합니다.
기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승리를 여러차례 선사하면서 샤를은공식적으로 대관식을 치르며 샤를7세가 되지만 어느 정도 전황이 유리하게돌아가자 협상을 통해 안정을 원하는 프랑스 왕실에게 공세로 일관하는 잔다르크는 골칫거리가 되어버립니다. 이에 잔다르크에게는 최소한의 지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결국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히게 되죠.실상 부르고뉴에서는 몸값만 받으면 잔다르크를 프랑스로 다시 인계할 계획이었지만 이 기회에 골칫덩어리를 제거할 수 있게 된 샤를7세는 어떠한몸값 제의에도 응하지 않고 부르고뉴에서는 결국 영국에 잔다르크를 인계하죠.
영화는 이런 상황에서 잔다르크가 영국파 성직자 70명에 의해 구성된 이단 재판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잔다르크가 진짜 성령을 받은 성녀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광신도에 불과했는지는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영화는 잔다르크가정말 성녀였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브레송이 묘사한 잔다르크는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영화의 처음 시작과 끝에서 브레송은 그녀의발걸음을 카메라에 묵묵히 담습니다. 애써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처음과 끝에서 보여준 것은 그녀의 성녀 이미지가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브레송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죠. 그녀는 모든 사람이 적대적인 곳에 홀로서있는 상황에 쳐해 있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한 명의외로운 소녀에 불과합니다.. 브레송의 방법론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잔다르크에게 강렬한 감정 연기를 시키면 오히려 과장된 코미디가 될 것이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제된 연기는 오히려 잔혹한 잔다르크의 현실과맞물리면서 그녀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하죠.

영화 속에서 잔다르크는 대단히 영리하고 재치있는 소녀입니다. 그녀는 신학으로중무장한 심문관들의 무시무시한 질문을 놀라운 논리로 분쇄시켜버립니다. 그녀를이단으로 몰고 가려했던 심문관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동일한 신학논리로 받아치는모습에 당황하죠. 이미 정해진 결론대로 가고 싶은 심문관들은 잔다르크의 논리에쩔쩔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늘 그렇듯이 논리로 상대방을 굴복시키지못한 사람들은 공포와 협박으로 이를 쟁취합니다. 영화 후반 잔다르크는 화형대앞에서 죽음의 공포로 그녀를 몰아붙이는 심문관들에게 결국 굴복해 자신이 이단이라는서명서에 서명하고 화형을 모면합니다. 이 장면은 놀랍습니다. 배우들의 표정 연기는영화 내내 변함이 없음에도 우리는 잔다르크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선을 읽을 수있으니까요.(아니면 읽고 있다고 착각하거나요.) 팔코네티의 표정 연기만큼이나이 장면에서 브레송의 연출은 잔다르크의 고뇌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고작 60분이 조금 넘는 미니멀한 흑백 영화지만 잔다르크의 재판은 걸작입니다.그 어떤 거창한 액션이나 눈부신 연기 없이도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신기한 경험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잔다르크에 대한 브레송의 영화는 드레이어의걸작과 비교해보면 더 즐거운 영화입니다.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잔다르크의재판을 보여주고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잔다르크 역시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하지만 우리는 진짜 잔다르크가 어떤 사람인지 영원히 알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두 감독이 보여준 잔다르크는 모두 사실은 아닐지언정 진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잔다르크의 수난은 더 큰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두 잔다르크 모두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브레송의 잔다르크는홀로 고립되어 죽어갔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은 꺽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공포심에 휩싸이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을극복하고 화염 속에서 '주'를 읎조리면서 죽어갈 때 우리는 기적이 없어도그녀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미니멀한 연출 방식을 고집하던감독이 마지막에 화형식장에 나타난 비둘기를 보여준 것은 잔다르크의 죽음에 바치는 나름의 경이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비둘기가 날아갔다는 기록이 있기는하지만 이를 영화 속에서 보여준 것은 결국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