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sue Point
▶ 1958년 칸 영화제에서 잉그마르베르히만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고 비비 앤더슨, 에바 달벡, 잉그리드툴린, 바브로히오르트아오나스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 산부인과 병동에 있는 세 명의 여성은 그들의 삶과 친밀한 생각을 서로에게 드러내며, 그곳에서 그들은 아기를 양육하거나 입양할 수
있는 선택에 직면한다.
■ 줄거리
산부인과 병실에 입원 중인 세명의 여인을 다루는데, 여성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삶을
그린다. 50년대 스웨덴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별로 바뀐게 없어서 더 놀라운. 곧 출산 예정인 스티나 외엔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하다가 스티나
마저 사산을 한 이후 너무 잔인한 현실이 아닌가 싶을 때쯤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결말로 나아간다. 단촐하게 몇명의 배우만
가지고 병실과 복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 힘있게 만든 작품. |
■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감독)
191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리만은 10대부터 연극을 접했고
청년기에는 무대연출, 창작희곡, 오페라와 라디오극을 오가는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46년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평생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작업했다. 초기작은 가벼운 희극을 주로 만들었고 (1953), 칸 영화제 시적 유머상이라는 특별상을
받은 (1955>등이 초기 대표작이다. 그러나 베리만이 예술가로서 진정한 명성을 얻은 것은
의 성공때문이었다.
이후에 만든 베리만의 후속작들 , 등 후속작들은 대중매체였던
영화를 영화감독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표현할 수 있는 아주 고급적이고 실험적인 매체로 격상시켰다. 베리만을 축으로 영화는 모더니즘 영화의
시대를 열었고 베리만은 그 당시 서구 지성의 대세였던 실존주의와 맞물려 '신은 있는가', '있다면 왜 인간들은 이렇게 서로 고독하고
고통스런 삶을 사는가'라는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1962),
(1963), (1963)은 신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3부작'이며, 의 여주인공이
외국의 호텔방에서 고통스럽게 병으로 죽어가면서 말하는 대사는 유명해졌다. "신은 침묵하고 있다."
60년대 초 베리만의 이름은 하늘을 찔렀지만 베리만이 형이상학의 그물에 빠져 정치를 외면한다는 좌파 진영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베리만도 그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2차 대전, 원자폭탄,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복판에서 이 예술가는 사회의 주변부에서
자학하면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1966), (1968)과 (1968)은 바로
격랑에 휘말린 현실 속에서 자기 내부의 망명정부로 퇴각한 예술가의 고통스런 자기 응시를 담은 또 다른 '3부작'이다. 특히
는 서구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정신을 한데 집약한 듯한 화술로 주목을 받았다.
'예술가 3부작' 이후에 베리만에게는 '여성의 감독'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1969) 이후로 베리만은
(1971), (1973)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의 조건을 탐구했다. 베리만의 후기 영화들은
사랑없는 관계 때문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아주 냉정하게 묘사했다. 특히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1979)는
실내극의 형식으로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라는 선입견을 섬뜩하게 뭉개버린다.
말년의 대표작인 (1983)는 베리만의 공식적인 은퇴작으로 각양각색의 다양한 인물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
베리만은 '신의 침묵, 인간의 타락, 사랑의 파멸'이라는 이제까지의 영화 경향과는 작별을 고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좀 푼수같고
인간적인 결점도 적지 않지만 연극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간다. 10살먹은 주인공 소년
알렉산더는 연극인 출신의 이 가문에서 자라면서 현실과 환상을 분간하지 못해 애를 먹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내는데 거미줄처럼 끝없는
상상력의 실을 자아내는 것이 바로 행복한 인생의 지름길이다. 에는 알렉산더가 다른 아이들에게 유령이 나오는
환등기를 틀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베리만은 항상 현실을 이렇게 저렇게 뒤틀어 볼 줄 아는 마술사같은 예술가를 찬미했다.
현대사의 격동기에 예술가로 살면서 변방에 유배당한 예술가의 고통을 나직히 고백했던 베리만은 어린 시절의 가슴떨리는 원초적 경험으로
돌아가 상상력만이 구원이라는 만년의 깨달음을 남겼다.
1984년 공식적으로 영화계를 은퇴한 후에도 시나리오작업, TV영화작업 등 활발한 활동으로 예술혼을 불살랐으며 2007년 7월 30일
향년 89세로 발틱해 연안 파로섬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 막스 폰 시도우 (출연)
막스 폰 시도우는 스웨덴에서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함께한 작업들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제7의 봉인(1957)」에서 죽음의 신과 체스를 두는 기사, 「산딸기(1957)」에서 작가 베리만의 세계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환한 미소를 띤 자동차 수리공, 「마술사(1958)」에서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 마술사 그리고 「처녀의 샘(1960)」의 복수하는
아버지 역할 등을 통해서였다. 폰 시도우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동원된 당황스러운 영화 「위대한 생애(1965)」에서 예수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스웨덴에서 점점 더 금욕적이고 불모적으로 변해가는 베리만의 영화(「겨울 빛(1962)」과 「늑대의
시간(1968)」 등)에서 감독의 음울한 제2의 자아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메이저 영화의 성격 배우로서 두 가지 평행적인 경력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메이저 영화의 성격 배우로서 그는 냉소적이고 위협적인 나치(「퀼러 비망록(1966)」)나 공산주의자(「크렘린 편지(1970)」)
역할들을 맡다가 「엑소시스트(1973)」의 메린 신부라는 또 하나의 비약적인 역할을 연기하게 되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엑소시스트
2(1977)」에서 젊은 시절의 메린 역으로 다시 출연한 폰 시도우는 희한하게도(늙은 케인으로 분장했던 오손 웰즈와 실제로 늙은 오손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겠다) 「엑소시스트」에서 딕 스미스가 분장해주었던 모습과 똑같이 늙어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세계적인 음모를 꾸미는 사악한 인물들을 연기하고(「콘돌(1975)」과 「고귀한 희생(1976)」), 덥수룩한 미래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또 하나의 전문 분야를 개척했다(「최후의 용사(1975)」와 「죽음의 중계(1980)」, 「이 세상
끝까지(1991)」). 지독하게 고생하는 스웨덴 농부 역할(「새로운 땅(1972)」, 「정복자 펠레(1987)」, 「옥스(1991)」)을
너무 많이 연기한 바람에 영화계에서 흥을 깨는 배우라는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베리만조차 그를 잘 기용하지 않았던 때에, 우디 앨런은 비참한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폰 시도우를 「한나와 그
자매들(1986)」에 캐스팅했다. 그러나 폰 시도우는 「제국의 종말(1980)」의 밍 더 머시리스 역으로 재미를 즐길 줄 아는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 덕분에 「승리의 탈출(1981)」과 「코난 더 바바리안(1982)」,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블로펠드
역) 등의 남자들이 좋아하는 모험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유럽과 할리우드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막스 폰 시도우는 세계적인 배우로서 50년 넘게 활동해오는 동안 감독 일에도 도전해보았다. 그는 1988년에 「카틴카」로 감독 데뷔를
하여 스웨덴의 굴드바예상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폰 시도우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배우보다는 감독의 표현 수단이라고 여긴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가 배우에게 달린 문제인 반면, 스크린에 한 역할이 그려지는 방식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권은 감독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연극에
비해 영화가 갖는 한 가지 커다란 이점으로 관객과의 근접성을 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