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sue Point
▶ 트로츠키 암살사건 : 리마스터링
■ 줄거리
트로츠키는 11년 동안 망명생활하면서 계속 스탈린과 투쟁한다. 집필을 하고, 연설을
하여 녹음하여 방송하며, 스탈린에게 저항한다. 스탈린에겐 강력한 무기와 병력, 그리고 권력이 있었으나, 트로츠키에겐 큰 힘이 없었다. 그는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정원이 달린 집에서 가축을 돌보고 식물도 재배하며, 밤에는 원고를 집필한다. 그의 무장력이 얼마나 없었으면,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하는 라몬 메르카데르이반트로츠키파를 이용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할 때 트로츠키 일원들은 대항할 무력적 수단이
없었다.
스탈린의 청부를 받은 그들에겐 위장경찰복과 손에는 기관소총이 들려 있었다. 운 좋게 트로츠키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의 충직한 부하
쉘던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스탈린에 대한 저항심과 그 저항심과 더불어 지식인으로서 의무, 그런 그를 받쳐주는
아내 나타샤만이 존재했다. 트로츠키는 고립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프랑스에서 지원금이 들어와야 하나, 1940년 8월 트로츠키가 살해되기
전 6월에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다. |
■ 리처드 버튼 (출연)
리처드 버튼은 광부의 13남매 중 12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장학금을
타도록 도와준 선생 필립 버튼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예명을 버튼이라 지었다. 1943년 첫 무대에 섰으나, 그 뒤 영국 공군 조종사로 복무해
활동이 지연되었다. 1948년 다시 무대에 섰으며, 〈돌윈 최후의 날 The Last Days of Dolwyn〉로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연극 작품은 〈The Lady's Not for Burning〉(1949) 이었다.
〈사촌 레이첼 My Cousin Rachel〉(1952)에서 배역을 맡아 할리우드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1950년대에는 대형 화면을
최초로 사용한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 The Robe〉(1953)·〈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1956)의
주연 등 역사적 인물을 주로 맡았다. 〈클레오파트라 Cleopatra〉(1963)에 출연하면서 슈퍼스타로 떠올랐으며, 영화 1편당 출연료로
1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최초의 배우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뒤 〈베켓 Becket〉(1964)·〈이과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1964)·〈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1965)·〈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6)·〈희극
배우들 The Comedians〉(1967)·〈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1967)·〈에쿠우스
Equus〉(1977) 등에 출연했다.
버튼은 연극에서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50, 1960년대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영국과 미국을 순회 공연했고, 1960년과
1980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뮤지컬 〈카멜롯 Camelot〉에서는 아서 왕 역으로 기억에 남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2번 결혼했다.
■ 알랭 들롱 (출연)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 미남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장 폴 벨몽도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였다.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멜로물에 출연하며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녹였을 것 같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가 주로 활약했던 장르는 액션물. 1970년 에서와 같이 터프한 마초맨이나 액션극의 영웅을 많이
연기했고, 때로는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 (67)에서처럼 차가운 캐릭터의 조연으로서도 스크린을
누볐다.
1935년에 프랑스의 소(Sceaux)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초년 시절을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나중에는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17세가
되던 해에는 해병대에 입대해 인도차이나에서 낙하선병으로 근무했다. 제대 후 마르세유로 돌아온 그는 열정적인 배우 장 클로드
브리알리(Jean Claude Brialy)와 교분을 쌓게 되는데 그의 초대로 1957년 칸 영화제에 참석한 것이 영화계에 진출하는 계기로
이어진다. 칸에서 들롱의 섬세한 외모를 눈여겨 본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David O. Selznick)이 그에게
여러 편의 미국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프랑스에 머물기로 결심했고 이브 알레그레 감독의 (1957)에서 단역으로 프랑스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어 피에르 가스파르 유이 감독의 (1958)에서 처음으로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주연을 맡고 몇 편의 영화에서
조연배우를 거친 후 1960년 드디어 르네 클레망 감독의 스타일리쉬한 스릴러 의 주연으로 일약 세계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다. 그는 이후 장 뤽 고다르, 루키노 비스콘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장 피에르 멜빌, 조셉 로지 등 거장 감독들과 예술성
높은 영화들을 작업하는 동시에 앙리 베르네이, 자크 드레이, 조제 지오반니, 베르트랑 블리에 등 대중성 높은 감독들과도 함께했는데, 특히
다수의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우수어린 눈빛과 차분한 연기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지지와 사랑을
얻어냈다.
1964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에서도 배우겸 제작자로 참여했다.
1964년 배우 겸 감독인 나탈리 들롱과 시작한 결혼생활을 69년 마감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안토니 들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