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INFORMATION]
1. 이소룡 (李小龍)
“나는 1인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2인자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는데, 유명한 경극배우였던 아버지 ‘이해천’이 어머니 ‘그레이스’와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어났던 것. 공연을 마친 후 ‘이소룡’과 그의 가족들은 홍콩으로 돌아와 생활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말썽을 자주 부렸던 ‘이소룡’은 자주 친구들과 문제를 일으켜 그의 부모를 곤란하게 했다. 그런 ‘이소룡’의 문제를 고쳐보기 위해 그의 부모는 지인인 영화제작자에게 ‘이소룡’을 맡겨 아역 배우에 입문하게 된다. 본명이 ‘이진관(브루스 리)’이었던 그가 ‘이소룡’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그 후 학업과 배우생활을 병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춘기 시절을 거치며 폭력 등의 문제를 자주 일으키곤 했다. 그러던 중 ‘이소룡’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영춘권’의 대가 ‘엽문’이다. ‘엽문’의 제자가 되면서부터 ‘이소룡’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고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 시민권이 상실되기 전 미국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59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미국 시애틀의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1년에는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 때부터 ‘영춘권’을 기본으로 다양한 격투와 무술을 혼합한 실전무술 ‘절권도’의 정립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1963년 자신의 무술인 ‘절권도’를 모토로 한 쿵푸학원을 설립한 후 대학을 중퇴한 그는 1964년에 대학교 동창이었던 ‘린다 에머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동양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할리우드가 ‘이소룡’의 무술실력에 관심을 보이게 되고 그는 TV 미니시리즈에 캐스팅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였으나 조연급으로 치부되는 동양인 캐릭터의 한계를 절감한 후 홍콩으로 돌아가게 된다. 홍콩에서 그는 (1971), (1972), (1972)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당대 최고의 액션 배우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나 1973년 홍콩 최초의 할리우드와의 합작영화 의 주연을 맡아 열연한 후 개봉 3주를 남겨 놓고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많지 않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액션배우로 전세계가 기억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보여준 액션과 무술에 대한 노력,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열정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절권도 (截拳道)
“무술이 담고 있는 진리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이 진리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봐라. 유용한 것은 받아들이되, 쓸모 없는 것은 버려라. 창조적인 인간은 어떤 무술이나 체계보다 더 소중하다.”
13세에 ‘엽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한 ‘이소룡’은 5년간 ‘엽문’의 밑에서 ‘영춘권’을 사사 받았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 간 ‘이소룡’은 낯선 이국 땅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어린 ‘이소룡’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무술이었고,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무술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수련한 ‘영춘권’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고, 실전에서 자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무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는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무술에 매달려 새로운 무술의 근간을 정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절권도’이다. 그가 창시한 무술 ‘절권도’는 이렇듯 실제와 효과를 중시하는 무술로 ‘주먹의 힘을 다스릴 줄 아는 무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의 무술들이 일정한 형식과 기교를 강조한 데 반해 ‘절권도’의 기본은 바로 ‘실전’에 있었다. 그는 예측하기 어려운 실전에서는 ‘영춘권’에 기초를 둔 빠르고 정확한 타격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자기 방어이자 공격법임을 강조하였는데, 그가 이를 통해 주장한 것은 바로 관습과 체계, 형식의 타파였고 ‘절권도’는 그런 그의 주장을 대변하는 실전무술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그 후 각종 쿵푸대회와 시범경기에 출전하여 직접 ‘절권도’를 시연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특이한 ‘절권도’의 스타일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그의 영화뿐만 아니라 그의 무술 ‘절권도’는 중국을 대표하는 무술이자 중국을 전세계인에게 알리는데 큰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다.
[ABOUT THE MOVIE]
1. 이소룡 탄생 70주년 기념 대작
1973년 7월 20일, 홍콩 최고의 한 액션 스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무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이 갖은 의문 속에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에 대한 과민반응에 따른 ‘과실사’로 최종 결론이 났으나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32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아쉬움에 기인한 의문들로 그가 젊은 나이임에도 사망하기 전까지 이뤄낸 업적은 대단히 기념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홍콩의 여느 평범한 배우들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걸어온 색다른 이력을 가진 배우였다. 그는 ‘절권도’라는 무술을 완성시킨 무술인이자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의 길을 걸어 온 아역배우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무술과 연기력을 모두 인정 받으며 미국 TV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나름의 영역을 개척, 선도적인 역할을 해낸 인물이다. 특히 그가 홍콩에 돌아와 본격적인 영화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완성시킨 , , , 등의 작품은 그의 놀라운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며 엄청난 성공을 기록했으며, 특히 그의 작품들은 홍콩 액션 영화의 트랜드를 변화시키고 주도해낼 만큼의 커다란 파급효과를 가져왔는데, ‘이소룡’의 뒤를 이어 80년대 홍콩 액션 영화의 주역으로 성장했던 ‘성룡’, ‘원표’, ‘홍금보’, ‘원화’ 등이 모두 ‘이소룡’의 작품에서 스턴트맨 또는 단역으로 출연한 사실만으로도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소룡’ 사후 등장했던 황가달, 유가휘, 양소룡, 당룡 등으로 이어지는 ‘포스트-이소룡 시대’의 배우들 대부분은 와 등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에 출연해 ‘이소룡’ 따라 하기 식의 액션으로 그의 아우라를 이어가기에 급급했다. 이렇듯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큰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간 배우 ‘이소룡’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큰’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의 탄생 70주년을 맞게 된 2010년에는 문화계 안팎의 수많은 기념행사와 더불어 그를 기리는 TV 미니시리즈와 영화 등이 연이어 소개되면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 ‘이해천’의 고향이자 ‘영춘권’의 스승이었던 ‘엽문’의 고향이기도 한 쿵푸의 메카 ‘불산’에 높이만 18.6m에 달하는 거대한 ‘이소룡’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이를 지지하고 있는 받침대에는 ‘쿵푸의 왕(功夫之王)’이라는 현판이 새겨졌다. 다른 곳도 아닌 ‘불산’에 그를 기리는 이러한 동상이 세워질 정도라면 그의 중국 내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영화 역시 그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영화는 그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이전의 시점. 즉,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어린 ‘이소룡’의 삶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의 진솔하고 꾸밈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2. 이소룡의 실제 동생과 누나가 영화의 자문으로 참여하다!
영화 은 시나리오부터 철저히 실화에 근거해 제작된 작품이다. 영화의 제작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 역시 이 부분인데, 이는 ‘이소룡’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제작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 이를 위해 제작진은 ‘이소룡’의 실제 동생인 ‘이진휘(로버트 리)’가 직접 집필한 [브루스 리, 마이 브라더]라는 책을 원안으로 했다. 이 책은 젊은 시절 ‘이소룡’의 진솔한 모습을 여과 없이 담아내 중국 내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 있는데, “내가 죽기 전 형을 기념하고 추억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꼭 해주고 싶었다.”라고 이야기 하던 그는 ‘이소룡’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 에 누나 ‘피비 리’와 함께 영화 도입부에 실제로 출연하여 자신의 형을 회상하고 추억한다. 영화 은 이처럼 ‘이소룡’의 실제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초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간 그의 숨겨졌던 실화들을 훑어 간다. 특히 ‘피닉스’란 이름으로 불리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말썽을 부리던 어린 그가 유명한 경극배우였던 아버지 ‘이해천’의 지인이었던 영화제작자를 통해 아역배우로 활동하게 되면서 얻게 된 ‘이소룡’이라는 예명의 유래와 일본과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홍콩에서 살며 나라 없는 국민으로서 느껴야 했던 울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러 찾아가 만나게 된 ‘엽문’과의 인연 등. 영화 은 어린 ‘이소룡’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액션의 전설 ‘이소룡’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완성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